백발 되도록 사귀었대도 칼을 빼들 수 있고, 출세한 선배가 갓 벼슬길에 나선 후배를 비웃기도 하지.
초록 풀은 가랑비 덕분에 촉촉해지지만, 꽃가지는 움트려는 순간 찬 봄바람에 시달리기도 한다네.
세상사 뜬구름 같거늘 무얼 더 따지겠는가. 느긋하게 지내며 몸 보양하는 게 차라리 낫지.
(酌酒與君君自寬, 人情翻覆似波瀾. 白首相知猶按劍, 朱門先達笑彈冠. 草色全經細雨濕, 花枝欲動春風寒. 世事浮雲何足問, 不如高臥且加餐.)
―‘배적에게 술을 권하며(작주여배적·酌酒與裴迪)’ 왕유(王維·701∼761)
관료 세계의 부조리와 염량세태의 매정함을 토로하며 후배에게 건네는 처세의 조언. 도무지 익숙해질 수 없는 세태에 대한 실망과 불만을 담았다. 술잔을 받는 배적(裵迪)은 시인보다 열네댓 살 어렸지만 둘은 친구처럼 지냈고, 특히 왕유가 만년에 장안과 별장을 오가며 벼슬과 전원생활을 겸하고 있을 때 둘 사이가 각별했다고 한다. 그런 터에 시인이 이런 푸념을 주저리주저리 되뇌다니 좀 새삼스럽긴 하다. 어쩌면 선배로서 노파심이거나 스스로에게 탈속(脫俗)의 의지를 재삼 각인시키고 싶었는지 모른다. ‘뜬구름 같은 세상사’이니 이것저것 따지고 자시고 할 것 없이 ‘느긋하게 지내자’는 권유, 혼탁한 인정세태로부터 영혼의 품위를 지켜내자는 이 반속(反俗)의 다짐을 친구도 흔쾌히 받아들이지 않았을까.
시에서 초록 풀과 꽃가지의 예로써 부당한 인간관계를 빗댄 발상이 흥미롭다. 별것 아닌 풀은 가랑비의 세례를 오롯이 받아 무성하게 자라는 데 비해 한창 물오른 꽃가지는 움트려는 결정적 순간 찬 바람의 방해에 부딪힌다. 얼토당토않은 비호로 벼락출세하는 소인배가 있는가 하면 시샘과 중상모략으로 소외되는 인재도 있다는 비유다